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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오늘은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해서 알아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마리 앙뚜아네트를 사치를 부리며 국고를 바닥나게 했으며,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어라."라고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말 사치를 부려 국고를 바닥 내었으며 민중의 고충을 1도 알지 못하던 그런 인물이었을까요? 


100% 팩트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시각도 있다는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오스트리아 여제 테레지아의 막내딸 입니다.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던 실정인지라 프랑스와의 외교를 통해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정략결혼을 시킵니다. 14세의 나이로 루이 16세의 왕세자비가 되었고 이후 남편이 왕위에 오르며 10대 나이에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앙숙관계였기에 프랑스 국민들은 그녀를 좋게 보지 않았고 그녀에 대한 평판은 좋지 못했습니다. 신혼 초에 후사를 보지 못해 루이 16세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습니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럽다, 많은 남자가 있었다는 등 악의적 소문에 희생양이 됩니다.)



하지만 소문과 다르게 프랑스 왕비치고 검소한 편이었으며 선량하고 동정심이 많은 성격이었습니다. 만나는 누구에게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편견없이 사람을 대했으며 루이 16세가 실수로 활로 농민을 다치게 했을때도 직접 달려가 치료해준 마음이 따뜻하고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딸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주가 어렸을 때 값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달라고 떼를 쓰자 "궁전 밖에는 많은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있으니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한다."라고 가르쳤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성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시민군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왜곡하여 알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말이자 프랑스 시민군들이 지어낸 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 


실제로는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 슈를 주세요."라고 말할 정도로

민중들을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많은 전쟁 특히 영국과 미국 사이의 독립전쟁을 지원하며 영국을 견제하려 하였는데 이 때 국가 재정이 파탄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화로 엄청난 성장을 하였고 영국과  정치적, 경제적 격차가 심화되었고 프랑스는 모든 면에서 불안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 배경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들은 알 바가 아니었고 화려한 왕실로 분노가 집중되었습니다.




이때 모든 분노는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몰렸고 앙투아네트의 사형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녀의 재판에서 재정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민중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 등의 혐의로 기소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혐의로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형시키기에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결국 재판 끝에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이렇게 되자 무죄방면 외에 길이 없어진 혁명정부 측은 마지막으로 아들과의 근친상간이라는 혐의를 내세웠습니다. 근친상간의 혐의를 고발자였던 에베르가 묻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은 자연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이 때 재판장에 있던 모든 여성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동조했고 고발자였던 에베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물러나고 만다.



하지만 결국엔 혐의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세뇌당한 어린 아들 루이 17세가 어머니에게 겁탈당했다는 증언을 하고 만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근친상간을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된다. 이 때 루이 17세는 양육을 맡았던 앙투앙 시몬에게 굉장한 아동학대를 받고 있었던 데다가 마약까지 동원된 상태였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3년10월16일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형 집행자의 발을 밟고서 남긴 "실례합니다. 일부러 그런건 아니에요." 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마지막까지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남편을 휘두르고, 국고를 낭비하고, 고국의 스파이 활동을 하며, 사생활이 추잡했다고 알고 있는 그녀. 하지만 역사는 하나의 시각만 있을 수 없습니다.

 

삼국지의 유명한 폭군 동탁은 악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소싯적 이민족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반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한 무리의 군웅이라는 사람이 정치력 없이 군사력만으로 정권을 잡기는 쉽지 않지요. 또한 우리가 의인으로 알고 있는 유비는 독우를 때려패고 관직에서 도망치기도 하고, 남의 집안싸움에 개입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던 유장의 믿음에 반하고 익주 일대를 지배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의 역사가 진실이 아닌 경우도 존재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였던 부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제가 서술한 글들도 진실만은 아닐 것 입니다. 하지만 당시 민중들의 분노가 치솟았아 이성을 잃어 수 많은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단두대에 목이 잘렸으며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들도 수 없이 잘려나갔던 시대 상황을 비춰봤을 때, 일정 부분 과장되게 알려진 부분이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주위에 일어나는 인간관계에서도 좀 더 포용력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이성적으로 사건들을 바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