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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외과학 발전사 이야기




의술에 관해 기록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1,600~1,500년 이전에 쓰여진 고대 이집트의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 (Edwin Smith Papyrus)" 입니다.


골절 외상 종양 발치 등 48 가지의 증례가 수록되있는데 주술적/미신적인 치료를 기록한 이전 파피루스들과는 달리 최초로 의학적 접근을 한 기록이라 의학사적 사료가치가 높습니다.

보다시피 각각의 수술에 따라 아주 다양한 기구들을 사용했고

이 이후 파피루스들에는 피부과, 안과, 비뇨기과 등 여러 질병분야에 관한 치료기록도 있습니다.


이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400년 경 고대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분은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잘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입니다.

'의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종교관 및 철학으로 부터의 독립 및 의학의 학문화

2. 히포크라테스 선서 (Corpus Hippocraticum)


당시에 사람들은 병은 "신께서 주시는 것"이란 종교관 / 철학관을 많이들 가지고 있었는데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이 습관, 환경, 음식 등 

"자연적" 요인들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개인의 청결을 중요시 하였고 정확한 진단을 강조하였으며 의사들로 하여금 각 환자의 정보를 세세히 기록하게 해서 후대의 의사들에게 양질의 정보를 넘겨줄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사로서 갖춰야할 기본 소양과 

직업의식 및 윤리의식을 강조했습니다.








A.D. 129 ~ 200년 로마제국 시대 


황제의 주치의였던 갈레니우스(갈렌)

사람을 해부가 금지되어 원숭이, 돼지 등을 대신 해부했고 

해부 생리학적 지식과 다양한 치료경험들을 모아 여려 책을 냈습니다.

 

비록 '사체액설'과 '미아즈마설'등 동양의 음양오행과 같은

말도 안되는 미신적인 철학들을 일부 믿기도 했다지만

갈렌식 의학은 당시에 두 말할 것 없이 뛰어난 의학이었고 

(2세기 당시는 물론이고 21세기의 한의학보다도 뛰어날 듯)

이후 1,000년이 넘게 의학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5세기에 로마제국이 동서로 쪼개지고 난 뒤에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유럽에는 의학의 암흑기가 찾아옵니다.





A.D. 476 ~ 1453 중세시대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로마의 갈렌식 의학을

유럽에서는 가톨릭 교회

동에선 비잔틴 제국이 1453년 패망까지 이어 나갑니다.


갈렌식 의학은 비잔틴 제국을 통해 이슬람에게도 퍼졌는데 

11세기 경에는 페르시아인인 아비세나(Avicenna)가 

'의학의 표준(Qanun of Medicine)'이란 백과사전을 집필 합니다.

이는 갈렌식 의학의 집합체 백과사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는 라틴어를 썼고 의학서적은 다 라틴어로 기록되었기에

라틴어를 아는 성직자들에 의해 의학의 맥이 이어졌는데 강력한 가톨릭 교회의 영향 아래있던 유럽의학은 당시의 종교적 신념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교황청이 부검을 금지하여 해부학 지식도 더 발전할 수 없었습니다.

"병은 신께서 내리는 벌," 

"성자들은 병을 치료하는 기적을 행함" 등의 믿음이 당대에는 만연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외과의사의 신분 또한 동시에 땅에 꺼질대로 꺼져버리고 

이발사-외과의(써젼)들이 마을을 돌며 머리를 깎는 동시에

필요한 경우 이런저런 외과수술 또한 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10세기 경 이탈리아 항구도시 살레르노에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종교와 의학을 구분지은 (=Secular)

'살레르노 의과대학'이 생겼습니다.


무역도시 답게 아랍인과의 무역으로 '의학의 표준(Qanun of Medicine)' 등여러 의학지식을 다시 흡수했으며 돼지 해부 및 외과 수술과 술기를 강조했고 써젼들로 하여금 외과수술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을 기록하게 하는 등 유럽 의학부흥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14세기 르네상스의 시작과 함께 더 많은 종교와 분리된 의과대학들이 생겨났고 15세기 에 이르러서는 교황청도 부검을 전면 허락하게 됐습니다.






(같은 시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사람을 해부하며 그린 그림들)


부검이 허락된 후 우리는 인체를 더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단지 의학 뿐만 아니라 예술과 미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인간이 생물체인 스스로를 성찰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16세기 초에 들어서는 처음으로 완전한 인간 해부 그림책 

"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벨기에의 해부학 교수가 출판하는데저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그 때 겨우 만 23살 밖에 안 됩니다. 흙 자괴감이...








같은 16세기에 활동한 유명한 외과의로는 전직 이발관-써젼이자

프랑스 전 장군의관 및 어의였던 앙브르와 파레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앙브르와는 터펜타인(소나무 기름?)으로 살균연고를 만들기도 했고 

환자 사후에 자주 부검을 실시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또 당시에는 전쟁 중에 총상을 입은 병사의 경우 수족을 절단한 후 

출혈을 막기위해 벌겋게 달구어진 쇠로 잘린 다리를 지져 태웠는데 

앙브르와는 실로 동맥들을 묶어 지혈함으로서 쇼크를 방지했습니다.

감염의 위험이 있긴 했지만 이런 술기는 당시에 혁신적이었습니다.


(근데 당시 병사는 마취도 없이 얼마나 아팠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19세기에는 현대 외과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주요 발견들이 있었습니다.


1. 마취수술의 등장 (위)


미국의 외과의사 워렌과 치과의사 모턴이 최초로 수술중에 

에테르를 이용해 환자를 마취한 뒤 수술을 시행했습니다.







2. 균/무균 개념과 멸균수술 (사진 왼쪽 부터 오른쪽 1,2,3,4)


(1)헝가리 산부인과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부검후 손을 씻지 않아 시체에서 옮겨온 병균이 산욕열을 일으킨다는걸 통찰. 

염소석회물 손씻기로 산모사망률을 90%나 감소시켰고 이를 적극 권장했으나 파스퇴르의 세균원인설 발표 이전이라 죽을 때 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2)프랑스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


파스퇴르는 공기 말고 공기 중의 "균"이 음식을 상하게 한다는걸 제시했고 전염병 또한 원인균에서 기인한다는 '질병의 세균원인설'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또 세균의 발견과 더불어 멸균하는 방법들 또한 제시해서 발표했습니다.


(3)영국 외과의사 조셉 리스터


파스퇴르로 부터 영감을 얻어 페놀로 멸균된 장갑, 수술도구 등을 사용해가며 사망률을 훨씬 낮춘 멸균수술을 개척 했습니다. '현대 외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리스터에 대해 알게된 독일 외과의사 테오도어 코허는 자신의 갑상선 수술들도 멸균수술로 시작했고, 성공했습니다. 갑상샘에 관한 공로로 나중에 노벨의학상을 탑니다.


(4)독일의 의사이자 미생물학자 로버트 코흐


파스퇴르 이후에 세균원인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냈으며

현대 세균학의 개척자로서 결핵균, 탄저균, 콜레라균을 발견해냈습니다. 특히 결핵균에 대한 공로로 나중에 노벨의학상을 탔습니다.


3. 멸균 라텍스 장갑과 마스크 등 (19세기 말)







현대에 들어서는 X-ray, 초음파, CT, MRI, 실험실 검사들, 내시경 등

물리학, 재료공학, 화학, 전자공학 등 다양한 학문의 융합작품을

스크린 진단 치료 및 예방을 위해서 매일같이 사용하는게 큰 특징이고  혈관, 심장, 흉부, 이식, 일반, 외상, 종양, 대장항문, 소아 등 고도로 전문화된 것, 고도로 전문화됨과 동시에 여러 세부 과들이 협력하여 시너지를 내며 일하는 것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 널리 빠르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걸 특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수 많은 전쟁, 지적 호기심을 통한 관찰과 통찰, 끊임 없는 연구가 합쳐져 과학의 총체적인 발전을 가져다 주었고, 외과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지금도 수 많은 연구원들이 실험을 하며 인류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외과, 의료학이 발전해서 인간이 영생을 얻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되네요.